
스물다섯 젊은 여배우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 인생의 꽃을 피우기도 전이어서 안타깝기도 했지만, 아역배우로 이미 입지를 굳힌 유명배우여서 사망사유에 더 관심이 모였다. 이후 유가족이 10년 넘게 정상의 자리에 있는 남배우를 사망원인으로 지목하며 애도와 슬픔은 이슈와 논란으로 확대됐다. 거듭되는 폭로와 상호 비방 속에 이젠 대통령 선거 이후 더 큰 폭로를 하겠다며, 대선까지 폭로시기에 감안하는 큰 이슈로 이목을 끌고 있다. 남녀의 애정사에서 죽음과 범죄까지 이어지며 로맨스가 아닌 느와르로 장르가 바뀐 논란이 점점 추악해지고 있다. 기사 클릭을 위해 편 갈라 욕하기보다, 관련자들의 심리를 추측하는 중간정리로 망자에 대한 애도를 먼저 하고자 한다.
◯ ‘성적 권력’과 ‘도덕적 책임’의 총체적 붕괴
故 김새론이 미성년자였던 시절, 성인 남성과의 교제 정황이 사실이라면, 이는 권력과 연륜의 비대칭 속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심리적 그루밍’ 사례라 할 수 있다. 법적으로 교제의 증거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 책임에서 면제될 수는 없다. 나이가 어리고 사회적 자원이 부족한 이에게 접근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사랑은 언제나 평등한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사건의 더 큰 비극은, 그녀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사랑의 언어가 상대 남성에 의해 ‘무효’로 선언되면서, 한 인간의 기억과 감정, 관계의 서사가 통째로 부정되었다는 데 있다. 故 김새론이 자필 편지와 디지털 메시지를 통해 남긴 “6년간의 연애”라는 고백은, 어쩌면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에 꺼낸 자기 진술이자 존재를 증명하려는 필사적인 기록이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고백은 한 때 사랑했던 남자에게서 “명백한 허위”로 단정되었고, 교제사실은 인정했음에도 그녀의 이름보다 ‘고인’이라는 익명으로 불려야 했다. 관련 증거를 은폐하고 삭제하려 했다는 폭로에, 단순 방어가 아닌 인간적 흔적을 제거하려는 시도라는 주장까지 있어 대중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 죽음을 소비하는 사회
사랑이란 타인을 존중하고 돌보며 이해하는 능력이다. 그럼에도 고인의 사망 후 벌어진 난타전은 고인이 남긴 ‘사랑의 언어’가 가십과 조롱의 소재로 소비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때나마 사랑했다면, 남겨진 이는 이미 고인이 된 망자를 좀 더 존중하고 생전의 그녀를 이해하는 노력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망자의 남자관계, 혼인유무, 음주사실 등이 자기방어를 위해서라도 굳이 필요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폭로는 더 큰 폭로를 낳고 비방은 더 큰 비방으로 남은 이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죽음 이후에도 타인을 도구화하는 행위는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경계했던 ‘소유욕 기반의 비인간적 관계’의 전형이다. 사랑에 따르는 최소한의 책임조차 외면한 채 자신의 사회적 생존을 위해 고인을 비하 하면, 이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과거 연인에 대한 배신으로 비춰질 수 있다. 단지 루머 소비로 시작된 가십에 감정이입해, 자신의 전 연인도 자신을 비방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공유할 수도 있다.
◯ 비극은 사과의 결여에서 시작된다
망자가 떠나도 남겨진 사람들은 현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어쩌면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고인의 사망으로 인한 피해가 두려워질 수도 있다. 피해 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고인의 사망원인에 대한 다른 이유를 찾아 세상에 드러낸 것이라면 그 진실이 무엇인지 대중은 알 수 없다. 스스로 생을 버릴만큼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을 하기까지 이유가 하나였을 수도 있지만 여럿일 수도 있고 그 원인에 대한 진실은 이미 떠난 고인만이 알고 있기에 우리는 추측할 뿐이다. 남겨진 이들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원인을 제시하느라 바쁠 때, 고인에 대한 사과는 결여되어 있음이 고인의 죽음을 더 슬프게 만든다. 한 인간의 죽음 앞에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인을 모욕하고 상호비방하기 전에 고인에게 사과하고 서로 애도했더라면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사회는 완벽함보다, 반성과 회복의 가능성 위에 유지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그 반대였다. 왜곡, 음해, 증거 인멸 시도, 거짓말 등 이 모든 과정은 개인의 비극을 ‘개인적 사건’이 아닌 ‘사회적 논란’으로 확대시켰다. 사과의 부재는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차라리 인정과 사과로 약을 발랐으면 논란이 확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늦게 교제사실을 인정하기 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최소한이라도 드러냈어야 했다. 개인의 사생활이라 부끄러웠을 수 있지만, 대중의 관심과 지지로 높은 수익과 인기를 누리는 대중예술인으로서는 대중의 관심이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대중의 지지 없이 존립할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였다면, “교제 한적 없다”고 부인하다 “성인이 되고 잠깐 교제했다”고 입장이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또 이에 대해 “미성년자인 중학생때 성관계를 했다”는 불편한 녹취가 공개되지 않았을 것이고, 이를 AI조작이라고 반박하는 분쟁이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은 진실도 궁금해 하지만, 미성년자 성관계 등 지나친 사생활에 대해 반감과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대중예술인으로서 대중이 관심 가질 수 밖에 없는 사안임을 이해해, 사실은 인정하고 잘못은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일부의 분노는 적어도 최소한의 인간적 이해로 바뀌었을 것이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고인을 비방하기 전에, 이미 떠나버린 고인에게 사과하고 애도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기에 더 큰 비극으로 확대되어 아직도 고인이 편히 쉬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이 사회적 분노를 넘어 비극과 공포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래도 진심으로 사랑했었기를’ 바랬던 이들의 마지막 기대를 져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은 극히 자연스러운 인생사의 한 부분이다. 사랑할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완성되지 못한 사랑도 아름답게 마무리 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의 기록이 비방의 증거로 악용되다보니 이 과정을 지켜보는 대중의 시선이 차가워지고 있다. 함께 나눈 시간이 추억이 아니라 아킬레스건으로 악용되는 현실을 아름답게 바라볼 제3자는 없다. 우리 모두가 자신은 누군가의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기에, 고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미 세상을 져버린 사람에 대한 악담이 편하지는 않다. 미성년자 성관계 유무나 수십억이 거론되는 증거 인멸과 회유 시도는,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수십억의 재산이 없는 미성년 자식을 둔 대부분의 서민들에겐 불편하기만 하다. 이 불편한 논쟁에 청부살인 의혹까지 더해지며 스릴러와 공포장르까지 추가됐기에 유명배우가 등장함에도 즐겁지만은 않다.
배우 2명의 사랑했던 기억에서 시작된 영화가 로맨스 장르가 아닌 것도 아쉬운데,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결말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이 예상된다. 결국 남겨진 것은 사랑 없는 기억과 기억 없는 분노뿐이다. 이 영화가 생전의 출연작을 모두 젖히고 배우 김새론의 대표작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우려는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대중은 영화 아저씨의 아역으로 귀여웠던 아역배우나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가 아니라 현실판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고인을 기억할 것이다. 이 추잡한 영화가 배우 김수현에게도 대표작이 될지, 그래서 이 논란이 김수현이라는 배우의 연기인생을 마무리 지을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더라도 김수현이라는 배우가 극중에서 과거처럼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할 것임은 명백하다. ‘별에서 온 그대’의 한류스타나 최근작 ‘눈물의 여왕’ 흥행보다, 미성년자 성관계 여부나 여성편력이 대표이미지가 된 배우의 앞날이 심히 염려스럽다. 이전 칼럼에서 언급된 가수 신정환 사례처럼 거짓말로 잊혀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 도민준도 백현우도 아닌 김수현
대중들은 법원이 아니다. 배우 김수현측에서 법을 어겼는가를 따지고 이에 분노하는게 아니다. 배우에게 사회정의나 준법정신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죽음 뒤에, 그것도 교제했던 연인의 죽음 뒤에 보인 행태로 인해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슬픔에 빠져있을 고인의 유가족들과 김수현측에서 벌이고 있는 논쟁은 배우 김수현 개인은 물론 김수현으로 이익을 얻기에 그를 보호하려는 김수현측에게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자살로 자식, 형제를 먼저 보낸 가족들에게 고인의 사생활을 비방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최소한 교제사실에 대한 부인으로 시작된 거짓말은 없었어야 했다. 또 성년이 되고나서 교제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혼인유무 등 불필요한 사생활을 드러내는 게 본 사안과 무슨 연관이 있을지 피로감이 증폭되고 있다. 한때나마 사랑했다면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도록 아름답게 보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여성팬들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미 사망한 전 연인의 유가족과 소송전을 벌이는 배우의 얼굴로 작품에서 사랑을 얘기한다면 몰입이 가능할까. 천송희를 살리기 위해 차를 막아서는 도민준이나, 시한부 부인을 살려냈던 백현우가 김수현의 실제 모습이 아님은 시청자들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가상의 세계에 몰입했기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는데, 이제 시청자가 김수현 배우가 출연하는 로맨스에 몰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위험율이 높은 문화산업이다. 수 많은 스탭들의 생계가 걸려있고 작품의 성패에 따라 제작회사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작품의 성공을 위해 당연히 노력해야하는 주연배우가 사생활로 기존 출연작마저 공개할 수 없는 현실에서 주연배우의 책임감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하게 된다. 글로벌OTT 디즈니플러스가 60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김수현 주연의 ‘넉오프’는 본 사태로 인해 공개가 무기한 연기됐다. 어쩌면 세상의 빛을 못 보고, 600억원과 함께 수백명의 노력이 사라질 수도 있다. 최근에도 배우 유아인의 마약투약으로 영화 ‘승부’가 뒤늦게 개봉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진 못 했다.
삶에 정답은 없지만, 가장 지혜로운 해답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미안하다’는 진심 어린 말 한마디, 시기적절한 진정 어린 사과가 의외로 쉽게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이 모든 논란의 사실여부는 아직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진흙탕싸움은 계속되겠지만, 교제한 적 없다고 했다가 교제했었다는 그녀는 스스로 세상을 떠났고 그는 ‘사람다움’을 잃은 배우로 남을 확률만 높아졌다. 그와 그녀는 정말 서로를 사랑했을까? 한때나마 사랑했었을까?
김민 전문기자 theMedia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