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이혼한 연예인들의 폭로가 화제다. 대중은 이를 보고 누가 더 잘못했는지 판단하며 시간을 보낸다.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유명인의 불행은 대중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고, 더군다나 연예인의 이혼이 날로 늘어가는 상황이니 그리 어색한 장면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 조금 민망한 장면이 있다. 이혼 소송 중에 있는 방송인 최동석을 돌싱 예능 ‘이제 혼자다’에 출연시킨 것이다. 이제 이혼이 별것도 아닌 게 된 시대의 흐름으로 봐야 할까. 하지만 이혼 관련해 상황 정리도 안 된 상태에서 TV 방송에 한쪽의 상황만을 노출시키면 결과적으로 그 자녀들과 가족들의 상처만 더 커질 뿐이다. 시대의 흐름을 생각할 건 아니다. 또한 박지윤과 최동석 중 누가 더 잘못했는지와도 무관한 문제다. 가수 최민환을 육아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시키고 가수 율희를 ‘이제 혼자다’에 출연시킨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이혼했는데, 상황 정리도 안 된 상태로 방송되고서 한쪽에 옹호하는 여론만 생겨났다. 결국 반대쪽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고 싸움만 커졌다. 이혼이 범죄는 아니기에 자숙을 꼭 필요로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혼이 좋은 건 아니기에 방송에서 너무
처음부터 끝까지 녹취 또는 녹취록이다. 통화 녹취는 기본이고 이제는 녹취한 걸 제3자에게 스피커로 들려주니 그 순간을 그 제3자가 녹취해서 또 난리가 났다. 차라리 3인 이상이 모여 비밀리에 회의한 걸 몰래 녹음한 거라면, 적당히 공적인 형식이라도 갖춘 자리를 녹음한 거라면 또 모를까, 단 둘이 통화하면서 내밀한 대화를 나눈 걸 가지고 무슨 대단한 꿍꿍이나 비위라도 있었던 양 호들갑을 떤다. 기자를 자처하던 서울의소리 이명수 씨는 김건희 여사와 통화하면서 “나 남자입니다” 그랬다. 김 여사가 통화를 녹음해 공개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자 ‘이래봬도 내가 입이 무거운 남자인데 그런 비열한 짓을 하겠나’라고 큰소리를 친 것이다. 그래놓고는 버젓이 그 육성을 공개했다. 이런 비열한 짓을 천연덕스럽게 저지른다. 그것도 자칭 기자가. 기자가 취재원과 통화를 해놓고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대중에게 던져 버린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준이 사람의 수준을 넘어섰다. 윤석열 대통령이 ‘김영선 공천 좀 잘 봐주라고 했는데 당에서 말이 많더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명태균 씨가 김영선 전 의원 공천을 당부하니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윤 대통령이 명씨와 통화를 하면서 나온 얘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는, 역사적 트라우마와 삶의 연약함을 시적인 문체로 표현한 혁신적 산문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이지만, 막상 한강의 소설을 읽어 본 사람들은 비판과 우려의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중 <작별하지 않는다>를 일독했다. 줄거리는 5•18 학살과 고문에 대해 책을 쓴 후유증으로 유서를 쓰고 삶의 작별을 생각하던 주인공 경하가 어느 날 꿈을 꾸면서 시작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벌판에 무덤 봉분들이 있고 주변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묘비처럼 심겨있는데 어느새 바닷물이 차오르자 봉분들만 남고 뼈들이 쓸려가버린 것 아닌지 걱정하는 꿈이다. 꿈의 광경이 계속 떠오르자 동료 인선에게 짧은 기록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무한으로 열리는 숫자인 99그루의 통나무를 심어 먹을 입히고 그 위에 눈이 내리는 영상을 찍자고 하였으나 그 프로젝트는 자꾸 미루어져 4년의 시간이 지난다. 제주 중산간 외딴 곳에 사는 인선은 갑작스럽게 부상 당해 서울에 입원하게 되고, 경하에게 제주에 내려가 키우던 앵무새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폭설을 헤치고 도착한 인선의 집에 새는 죽어 있었고, 그곳에서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지도 10년이 되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대중이 그를 기억하는 이유가 뭘까. 그가 더 좋은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나이였음에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해서 그렇기도 하겠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그는 그저 ‘가수’라고만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의 음악을 찾아 듣는 걸 넘어 그가 출연한 방송이나 발언 등을 찾아보며 그리워하고 있다. 신해철은 ‘마왕’, ‘락의 교주’ 등을 별명으로 가졌던 만큼, 좋은 음악을 넘어 자신의 삶과 철학까지도 대중에 전하며 팬들의 삶에 깊이 영향을 준 문화인이다. 최근 방영한 MBC 다큐 ‘우리 형 신해철’에서 나오기를, 그의 팬 중 그 덕분에 진로를 발견했다고 말한 이들도 꽤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그는 ‘날아라 병아리’(1994)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고찰을 담았고,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1999)를 통해 청년의 삶에 대한 고찰을 담는 등 음반을 통해 사회적인 예술을 했다. 신해철의 음악은 너무 진지한 마음이 느껴져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보통 가요처럼 연인 간의 사랑 이야기를 주로 하거나 그의 대학가요제 대상 노래였던 ‘그대에게’(1988) 같은 노래만 만
우리나라 우파는 건국도 했고, 산업화도 했지만 하지 않은 게 있었다. 그게 바로 정치였다. 우파의 정치는 사실상 청와대의 국회 파견 업무였다고 봐야 한다. 반면 좌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정치만 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우파와 좌파의 이런 선택의 결과이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의사 결정이며 그래서 리더십 창출 과정이다. 우파가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파 정당이 언제부터인가 사실상 리더십 창출에 실패한 불임 정당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강의 노벨상을 보면서도 우파의 리더십 부재 현상을 엉뚱한 방면에서 확인하게 된다. 한강의 노벨상은 그 출발점이 사실상 1987년 체제에 있다고 봐야 한다. 좌파 연합(호남-주사파)이 정치적 승리자이자 87체제의 오너가 된 것이 출발점인 것이다. 정치적 승리란 것은 그 공동체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 왜냐? 정치가 의사 결정이기 때문이다. 시장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 영역 흔히 말하는 주권의 예외적 상황에서 작동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상적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 결정은 무조건적인 정당성을 갖게 된다. 87체제에서 좌파가 승리자로 등극
범보수우파 진영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언론인으론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과 정규재 전 한국경제 주필(펜앤드마이크 창립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각각 조갑제TV와 정규재TV를 운영하며 유튜브를 주요 무기로 언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정규재 기자는 펜앤드마이크 주필로 활동하던 지난 2020년, 그해 총선에서 자유한국당 참패 후 보수우파 진영을 들썩이게 했던 부정선거 주장을 인정사정 없이 짓밟았고 그 대가로 펜앤드마이크 독자와 구독자가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조갑제 기자 역시 부정선거 주장을 ‘음모론’이라고 맹공격하며 일부 보수 진영의 미움을 독차지했다. 조갑제 기자는 윤석열 정부의 의료개혁에 대해 ‘좌파식 개혁’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정규재 기자는 의사 집단도 함께 비판한다. 그 점이 다를 뿐 두 기자는 성역 없이 저널리즘의 칼을 들이댄다는 점에서 똑같다. 최근 두 기자가 또 이구동성 의기투합하는 사안이 하나 생겼으니 바로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노벨상’ 쯤의 성역은 이들 기자에겐 초등학교 우등상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 이미 대통령도 진영의 손가락질도 걷어차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그동안 둘을 욕했던 보수우파 인사들은
한국 소설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놀라운 일이다. 한국 작품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하니 누군가는 자부심을 느끼고, 누군가는 큰 축하 인사를 보낸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 모두의 인정을 받는다 해도 그게 꼭 악하지 않다는 징표는 될 수 없기에, 지성인이라면 어떤 작품이든 분별하며 볼 수 있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2007)에 담긴 음란 묘사, ‘작별하지 않는다’(2021)에 담긴 제주 4·3 옹호 등 그녀의 글에는 불순한 게 많았다. 이 틈을 타 오마이뉴스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띄우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수십만 역사 교사와 학자, 활동가들이 못한 일”을 해냈다는 한 교사의 말을 인용하며, 늘 그래왔듯 제주 4·3에서의 남로당 공산 폭동을 미화하고 있다.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국민들의 씁쓸함을 부추기는 장면, 그리고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며 문화·예술의 사회적 영향력을 무시하는 이들을 일깨우는 상황이다. 그러니 한 작가에 대한 축하도 잠시 그녀의 소설이 사회적으로 특히, 청소년들에게 악한 영향을 주지 않도록 비판을 가하는 게 적절해 보이는 상황이다. 미디어상에서는 한 작가를 치켜세워주는 건 물론, 그녀가 출연
요샌 인터넷 SNS도 주요 취재 공간이다. 블로그, 페이스북, 유튜브 등에는 잘만 가공하면 여느 메이저 언론사 ‘단독’ 기사 못지 않은 기사거리들이 제법 있다.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이 발표된 지 나흘이 지난 오늘도 클릭질을 하다가, 한 페이스북 친구가 이런 걱정을 글로 옮겨놓을 걸 발견했다. “한강 작가의 소설에 대해 많이들 관심 가지실 듯하나, 약간의 주의를 요한다.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내가 너무 순진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거 너무 변태 아닌가 싶어 많이 불편하고, <희랍어 시간>은 진짜 희랍어로 써진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뭔 말인지 모르겠다. 단편집 <노랑무늬영원>은 그나마 읽을만하나, 너무 음울해서 힘들다.” 노벨상 수상이 국민적 축제가 되면서 인쇄소가 모처럼 밤샘 근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간 출판계의 불황을 생각하면 기분 좋은 뉴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득, 책을 산 시민들이 독서 후 얼마나 자신의 독서를 만족할지가 궁금해졌다. 대다수는 단순히 한국인의 노벨상 수상을 기념하고 책을 ‘소장’하기 위해 한강 작가의 책을 사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급 전쟁’을 부제로 단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경연 참가자들의 계급은 백수저와 흑수저로 나뉘었다. 백수저는 쉽게 말해 유명 요리사, 흑수저는 무명 요리사라 볼 수 있다. 흑수저에도 유튜브나 다른 예능 통해 꽤 이름 알린 승우아빠(목진화), 평가절하(박정현) 등 있지만, 백수저에는 오로지 요리사로서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를 통해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들이 속해 있기에 흑수저는 이들에 비하면 무명이 맞다. 흑수저에는 요리사 80명, 백수저에는 20명이 속했다. 흑수저는 1라운드에서 20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백수저는 20명 모두 부전승이었다. 이때부터 작은 논란이 있었다. 백수저가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부전승하는 건 불공정하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백수저 요리사들이 레거시 미디어에 섭외받고 시청자들에게 인정받아 유명해지기까지의 능력은 인정해야 한다. 미디어를 통해 나오는 것이 다 옳지는 않고 다른 실체가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요리사이기에 이들이 만든 음식의 실체는 알기가 쉽다. 직접 이들의 식당에 가서 먹어보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손님들에게도 인정받은 사람들이 백수저다. 그런 점에서 백수저의 부전승은 불공정하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며칠 전 다퉈 냉랭한 아내에게 “한강이 노벨상 탔대”라고 소리친 것이다. 노벨상 수상을 빌미로 아내와 화해하려 했던 의도는 아니었다. 정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칠 정도로 너무 놀라웠던 것뿐이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채식주의자’ 딱 한 편 봤다. 맨부커상을 탔을 때였던 것 같은데, 서점에 갔더니 여기도 한강, 저기도 한강이었던지라 기자라면 이 정도 분위기에는 편승할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해 한 권 사들었다. 감상평은? 무식이 탄로나는 것 같아 두렵지만 고백하자면 ‘이 정도 작품이 그렇게 놀랄 만한 수준인가’였다. 사실 몰입이 잘 안 됐고, 문체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한마디로 술술 읽히지 않았다는 얘기다. 다만 한 가지! 도대체 결말이 어떻게 될지가 매우 궁금했다. 술술 읽히지 않았지만, 책장을 술술 넘겨 끝까지 읽었다. 다 읽은 후에 ‘내가 이 작품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고민했지만, 몇 분간 그러다 말았다. 이문열 작가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게 이렇게 놀라운 것이구나 싶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작품에 한껏 몰입했고 몇번이나 피부에 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