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말 뉴욕을 배경으로 한 네 여성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는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를 넘어, 여성의 욕망과 일하는 커리어우먼의 고민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도시의 삶을 스타일리시하게 풀어낸 이 시리즈는 방영 당시뿐 아니라 이후에도 수많은 팬의 사랑을 받았고, 주인공 네 사람은 그 자체로 '우정의 상징'이 되었다. 인기에 힘입어 TV시리즈 종영 후에 극장용 영화로도 제작돼 상영됐고, 이후 속편 영화도 제작됐다.
2021년, 이 드라마는 리부트작 《앤 저스트 라이크 댓》으로 다시 돌아왔고, 최근 한국OTT에서도 스트리밍되며 국내에서도 다시 관심 받고 있다. 발랄했던 뉴욕 여성 4명이 여전히 뉴욕에서 보내는 중년 이후의 삶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선보였지만, 팬들은 첫 에피소드 시작과 동시에 한 가지 큰 공백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바로 ‘사만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극 중에는 뉴욕을 떠났다는 대사로 처리됐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에서 드러난 배우들 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특히 킴 캐트럴(사만다 역)과 사라 제시카 파커(캐리 역) 사이에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긴장감은, 드라마의 열렬한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작품 속에서는 이상적인 여성 간의 우정으로 표현됐지만, 무대 밖에서는 다른 종류의 ‘드라마’가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1998년 시작된 《섹스 앤 더 시티》는 사라 제시카 파커(캐리), 킴 캐트럴(사만다), 크리스틴 데이비스(샬롯), 신시아 닉슨(미란다)의 여성 4명이 주역이었다. 2004년 시즌6을 끝으로 시리즈는 종영됐는데, 이미 현장에서는 킴 캐트럴과 다른 배우들, 특히 사라 제시카 파커와의 거리감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 첫 번째 극장판 영화 제작 당시, 킴 캐트럴(사만다 역)은 출연료 및 대우 문제로 출연을 망설였지만, 최종 합류했다. 2010년 두 번째 영화 촬영 이후, 킴 캐트럴은 "사라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다"라고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정작 사라 제시카 파커는 이를 부인하며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였음을 강조했다. 오랜 팬들에게, 현실에선 두 사람이 친구가 아님이 공개된 것이다.
이후 세 번째 영화가 기획됐지만 결국 무산된다. 그 원인이 킴 캐트럴의 출연 거부라는 보도가 이어지며, 현실에선 《섹스 앤 더 시티》의 우정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렸다. 킴 캐트럴은 SNS를 통해 사라가 위선적이라며 공개 비난했고, 이후 모친상을 위로한 사라의 메시지에 ‘가식적 접근 말라’며 차단하기도 했다.
킴 캐트럴은 “사라 제시카 파커는 모두가 좋아하는 배우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공개 발언하며, 촬영 현장에서 자신이 오랜 시간 소외감을 느껴왔음을 드러냈다. 반면 사라는 주연 배우이자 제작자로서, 팀워크를 유지하고 현장의 균형을 조율하는 역할에 집중해왔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리더십과 오해의 대립 구도로만 보는 것은 섣부르다. 구체적이고 단일한 갈등의 원인은 외부에 명확히 밝혀진 바 없으며, 그 실상은 결국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사소한 감정의 온도차였을 불편함이, 오랜 시간 누적되며 오해와 상처를 반복했고, 그 틈이 점차 단절로 굳어졌을지도 모른다. 최근 국내 지상파방송사 기상캐스터의 자살로 직장 내 괴롭힘이 화두가 됐다. 기상캐스터가 프리랜서 비정규직이라는 점에서, 직원 간의 불화가 자살로 이어질 만큼 심각했지만 비정규직이었기에 사측에서 방관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구성원 간의 불화가 작품이나 방송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은 이미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된다.
언론은 사라의 신중한 태도를 ‘품위’와 ‘리더십’으로 포장하기도 했지만, 침묵이 반드시 성숙함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갈등을 외부에 드러냈다고 해서 그 사람을 곧바로 ‘문제적 인물’로 단정짓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진실은 언제나 더 복잡하고,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과 사연이 얽혀 있기 마련이다.
여성 배우들의 갈등은 특히 질투, 시기, 히스테리 같은 단어로 비하되기 쉽다. 더욱이 우정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 실제 배우들 간의 불화가 드러나면, ‘여자들끼리는 결국 싸운다’는 낡은 프레임 속에서 ‘여자의 적은 여자’로 결론 지어진다. 하지만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이 우정도 갈등과 조율의 연속이다. 우정이라고 해서 모든 게 매끄럽고 완벽하게 흘러가는 감정은 아니다.
오히려 불편함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에 눈을 돌려야 할 감정인지도 모른다. 현실이 이상적인 판타지와 비슷하길 바라는 건 시청자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드라마 속 ‘네 여자’는 다시 만났지만, 현실 속 ‘네 배우’는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 어긋남이 어쩌면 더 진실에 가까운 우정의 모습일 수 있다.
드라마는 사만다를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대사 속에서 언급되고, 문자 메시지를 통해 캐리와 소통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20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제작될 만큼 열성팬이 많았던 명작의 균형을 깨트린다. 사만다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녀는 《섹스 앤 더 시티》가 섹스와 욕망,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주제를 유쾌하면서도 정면으로 다룰 수 있었던 핵심 축이었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과감함과 솔직함으로, 사만다는 이 드라마가 자유로운 여성 캐릭터를 구현한 흔치 않은 작품임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런 인물이 빠진 《앤 저스트 라이크 댓》이 같은 ‘정신’을 온전히 이어가고 있다고 주장할 순 없을 것 같다.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가장 솔직했고 가장 자유로웠던 목소리 하나가 빠졌다는 사실은 결국 이 드라마에 지울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긴다.
우정과 사랑의 《섹스 앤 더 시티》는 한 시대 여성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이상적인 관계 뒤에 숨겨진 현실의 복잡함과 감정의 균열까지 비춰주는 거울 같은 작품이 되었다. 이상과 현실이 같을 거라고 믿는 순진한 시청자는 없겠지만, 가족보다 가까웠던 이상적인 우정이 결국엔 허구의 드라마에서조차 재현될 수 없을 만큼 앙숙이었다는 현실은 드라마에 몰입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차가운 현실이다. 배우 이전에 인간이기에 인간적인 갈등은 있을 수 있지만, 배우이기에 네 배우 모두 등장해 시청자의 오랜 기다림에 보답할 필요도 있었다.
과거 인기 드라마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보려는 제작사의 상업주의는 이해하지만, 굳이 네 여성의 우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음을 작품으로 보여줌으로써 20년 전 《섹스 앤 더 시티》의 환상에 빠져있고 싶은 팬들의 추억을 방해한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50대가 돼서도 자유연애하며 스스로 성결정권을 갖는 당당한 중년여성들의 유쾌한 연애담을 기대했을 시청자들이, 자유분방함의 상징이었던 사만자는 런던으로 떠나서 보이지도 않고 캐리는 아파서 계단을 오르기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까? 20년이 지나 주름은 늘었어도 1990년대처럼 뉴욕거리를 활보하는 4명의 여성을 통해 다시 해방감과 대리만족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게 《앤 저스트 라이크 댓》은 ‘세월 앞에 장사 없다’며 신세한탄하는 것 같다. 실현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10년 뒤에 후속 시즌이 제작된다면, 60대가 돼서도 여전히 예쁘고 당당하게 자기 삶을 결정하는 네 여성의 이야기가 담기길 기대해본다.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고 뉴스도 아니다. 20년 전엔 롤모델이었던 네 여성이, 이젠 셋으로 줄어 전 남편 과거에 집착하는 걸 보며, 시청자들은 더 이상 롤모델이 없음에 실망하지 않았을까. 《섹스 앤 더 시티》의 골수팬들이 드라마를 통해 잠시라도 꿈꾸길 기대할지, 늙어가는 현실을 자각하고 싶어할지 제작사에서 먼저 고민했어야 했다.
김민 전문기자 theMedia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