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가 한국에서는 2005년 부산회의 이후 20년 만에 21개 회원국 정상이 참석한 가운데 경북 경주에서 다시 열렸다. APEC은 1989년 호주 캔버라에서 출범해 1994년 정상회의 체제로 격상됐다. 당시 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 회의에서는 무역·투자 자유화를 목표로 한 ‘보고르 선언’이 채택됐다. 현재 회원국은 21개국, 인구는 약 30억 명으로 세계 인구의 38%를 차지한다. 2023년 기준 회원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 합계는 67조 8000억달러로 세계 경제의 61%에 달한다. 한국도 APEC 21개국과는 교역의 65% 이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앞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대 경제포럼인 '2025 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이 글로벌 주요 기업인이 한자리에 모이는 28일 저녁 환영 만찬을 시작으로 29일부터 31일까지 열렸다. 이재명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아태 주요 정상과 서밋 의장인 최태원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 정기선 HD현대 회장,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등 국내외 글로벌 주요 기업인 170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역대 최대 규모로 개최되었다.
올해 경주 회의에서는 디지털 격차 해소, AI 협력, 인구구조 변화 대응이 우선 과제로 제시됐다.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 산업 공급망과 기후금융 문제도 논의되었다. 정상들은 APEC서 정상회의서 통상부터 안보까지 치열한 외교전 외고전을 펼쳤다. 한미 한일 한중 등 정상회담이 줄줄이 개최되어 APEC 슈퍼위크로 불렸다.
31일 개막된 APEC 정상회의 본회의는 21개 회원국 외에도 칼리드 아랍에미리트(UAE) 왕세자,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등이 참석했다. 정상회의에선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 가능한 내일’이란 목표 아래 중점 과제인 ‘연결·혁신·번영’ 등을 실현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특히 10.29 한미정상회의에서 오랫동안 진통을 겪어오던 한미관세 협상 타결되었다. 총 대미 투자액 3500억 달러(약 497조 원) 중 현금은 2000억 달러(약 284조 원)로 하고, 이 또한 연간 상한액은 200억 달러(약 28조 원)로 설정했다. 당초 양국이 두 달 넘게 협상에 진통을 겪은터라 타결까지는 이를 가능성이 낮다는 전망이 나왔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끝난 지 약 3시간만에 극적 합의에 이르렀다.
이날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대한민국 정부는 10월 29일 미국과의 관세 협상의 세부 내용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양국 세부 합의 내용에 대해 “대미 금융 투자 3500억 달러는 현금 투자 2000억 달러, 조선업 1500억 달러로 구성됐다”고 했다. 이어 “2000억 달러 투자를 한번에 하는 것이 아니고 연간 200억 달러 한도 내에서 사업 진척 정도에 따라 투자한다”며 “(우리) 외환시장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에 있어 외환시장 영향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의 연간 대미 현금 투자한도를 미국은 연간 250억 달러 한국은 연간 150억 달러를 주장해 왔는데 절충안이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양국의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에 대해서는 “마스가는 우리 기업 중심으로 추진된다”며 “(투자에) 보증도 포함하는 것으로 했다”고 했다. 이어 “장기 금융으로 자금 조달하는 선박 금융을 포함해 외환시장 부담을 줄이고, 우리 기업의 선박 수주 가능성을 높였다”고 했다.
양국의 상호 관세에 대해서는 “15%로 인하해 지속 진행된다”며 “자동차 부품 관세도 15%로 인하됐고, 의약품은 최혜국 대우를 받기로 했다”고 했다. 이어 “미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천연 제품은 관세가 없다”고 했다. 수출에서 대만과 경쟁 관계인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는 “반도체는 대만 대비 불리하지 않은 수준의 관세“로 정해졌다고 밝혔다. 아울러 “원금 회수를 위한 다층적 장치를 마련했다”며 “원금 보장되는 상업적 합리성이 있는 사업에만 투자하는 것을 명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특히 한국 산업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협의위원회가 미국 상무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투자위원회에 협의를 하도록 하고 프로젝트 매니저에 한국인을 고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절차는 제조업 강국인 한국의 경험이 미국 제조업 부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양국의 투자 수익 배분에 대해선 “원리금 상환 전까지 한미가 각각 수익을 5 대 5로 배분하기로 돼 있다”며 “한국이 일정 기간 20년 내에 원리금을 전액을 상환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이면 수익 배분 비율도 조정 가능한 것으로 서로 양해했다”고 밝혔다. 다만 원리금 상환 후 배분이 명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양국 협상 결과를 초조하게 지켜봤던 기업들도 환영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한미 상시 무제한 통화스왑은 끝내 불발되어 미일 동맹은 새로운 황금시대(New Golden Age)를 함께 열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한미관계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협상과정에서 일본과 같은 상시무제한 통화스왑도 떠올랐다. 미국이 상시 무제한 통화스왑을 체결하고 있는 나라는 유럽연합 영국 스위스 캐나다 일본 뿐이다.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동맹국들에게 필요하면 언제든지 달러를 무제한 가져다 쓰라는 일종의 통화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동맹국으로서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이다.
그러나 미국의 한국에 대한 신뢰는 그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의 미국방문시 공동기자회견은커녕 트럼프의 배웅도 없었던 데다 이어진 이 대통령의 유엔총회 참석 시에도 한미정상회담이 불발되는 등의 일들이 이어지면서 한미 간의 정상외교가 이대로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이 대통령이 임명한 주미대사의 신임장 제정도 아직 안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고 미국은 주한대사에 연이어 직급이 낮은 대리대사를 임명하고 있다. 통화동맹을 거론할 정도의 신뢰 있는 동맹관계라고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APEC 참석에 앞서 27일부터 2박 3일간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역사상 최초로 여자 총리로 선출된 다카이치 총재는 여자 아베로 불리는 인물이다. 과거 아베 수상이 트럼프 1기 시절 골프 드라이브를 들고 당시 트럼프 당선자 사저를 방문해 축하하고 라운딩을 같이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러한 미일간 신뢰를 바탕으로 ‘미국의 양해 하에’ 일본판 양적 완화, 엔화의 대폭적인 절하 등으로 장기불황의 일본경제 회복을 시도한 것이 아베의 ‘세 개의 화살정책’이다. 이번에도 일본 총리는 아베의 퍼트를 선물했다고 한다.
모처럼 찾아온 외교의 호기인 APEC 정상회의에서 한미 관세협상이 타결된 점은 다행이다. 그러나 미일 간 ‘새로운 황금시대’를 여는 일본처럼 한미 간에도 동맹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한미 간 신뢰회복을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다. 신뢰회복을 토대로 한 한미 간 경제 안보 관계를 더욱 튼튼히 해야 할 때다.
오정근 바른언론시민행동 공동대표
자유시장연구원장·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
트루스가디언 논설위원








